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수·순천 10.19 사건 (문단 편집) === 정부의 진압 === || [[파일:불타는 여수 시내.jpg|width=100%]] || [[파일:20140825103256903398.jpg|width=100%]] || || 진압 작전 도중 불타는 여수 시내 || 불에 타 폐허가 된 여수 || 이에 정부는 10월 21일에 반란군이 점거한 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군을 파견한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 일부 진압군이 반란군으로 돌아서기도 하는 등 꼴이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남로당계 중대장이 자신의 대대장에게 [[기관총]]을 갈겨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고립된 반란군의 세력은 차츰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원래 계획은 북한에서 밀고 내려오면 이와 동시에 지리산유격전구에서 광주 [[제20기갑여단|4연대]]를 시작으로 여수 14연대, 마산 [[제15보병여단|15연대]], 전주 [[제3보병여단|3연대]], 군산 [[제12보병여단|12연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영남 및 태백산유격전구에서 대구 6연대를 시작으로 부산 5연대, 청주 [[제7보병여단|7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며 오대산 유격전구에서는 강릉 [[제8보병여단|8연대]], 춘천 1대대, 원주 2대대가 반란을 일으켜 대한민국 전역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거는 없었다. 오직 14연대만 성공하고 6연대가 3차에 걸쳐서 반란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6, 70명이 [[팔공산]]에 입산했을 뿐이다. 일단 북에서 안 내려왔으니 결국 14연대도 속은 셈이다.] 육군총사령관 [[송호성(군인)|송호성]]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는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진압군은 [[대전광역시|대전]] [[제2보병여단|제2연대]], [[전주시|전주]] [[제3보병여단|제3연대]], 광주 [[제20기갑여단|제4연대]], [[부산광역시|부산]] [[제5보병여단|제5연대]], [[대구광역시|대구]] 제6연대, [[군산시|군산]] [[제12보병여단|제12연대]], [[마산]] [[제15보병여단|제15연대]]의 전 병력 또는 일부 차출병력,[* 구체적으로는 제2연대 中 1개 대대, 제3연대 中 2개 대대, 제4연대 中 3개 대대, 제5연대 中 1개 대대, 제6연대 中 1개 대대, 제12연대 中 3개 대대, 제15연대 中 1개 대대 총 12개 대대가 동원되었다.] 육군비행대 L-4 10대, 육군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기갑연대]] 소속 장갑차 20대, 해군 경비정 7척, 서울 및 각도 혼성 경찰병력 약 2개대대로 거의 1개 사단 규모였다. 그에 반해 반란군은 김지회의 14연대 주력 2대 대대 1,400명에 홍순석의 2개중대, 4연대 1개 중대등 1,600명 중대였다.[* 이러한 병력 과잉 동원과 우군 각 부대간의 협조체계 미비, 사격군기 문란으로 진압군끼리 격렬한 사격전이 펼쳐졌다. 주요도시 수복 이후 야간에 졸다가 실수하여 밤새 사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아군끼리의 교전은 반란군이 이미 지리산으로 다 들어간 이후에도 계속 벌어졌다.] 진압군 중 4연대는 21일 새벽 구례방면으로 북상하던 홍순석의 부대를 순천 북방 약 8km 지점 '''[[서면(순천)|서면]] 학구리'''에서 격파하였다. 진압군의 첫 승리였다. 그 바람에 홍순석 부대는 이미 광양방면으로 이동하던 김지회와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부터 순천탈환 작전에 들어가 22일 오전 순천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한편 [[광양]]방면으로 이동중인 김지회는 22일 오후 광양군 옥곡면 백운산 기슭에서 마산에서 출동한 15연대와 대치중 연대장 최남근과 만나는데 그는 이현상과 만나 자신의 행동 지침을 듣기 위해 [[포로]]로 가장하여 입산한다. 이때 군내 지하세력을 유지하라는 지령을 받고 탈출을 가장하여 하산한 최남근은 이후 이 사실이 발각되어 총살당한다. 이 때 진압군은 여수, 순천을 회복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현상-김지회의 반란군 주력의 목표는 지리산 입산이었고, 이에 전투를 회피하며 빠져나갔다. 사실 원래 진압군의 작전은 지리산 입산 차단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19일에 일본으로 갔고, 20일 새벽 기타 주요인사가 모인 회의에서 국무총리 이범석이 지도를 보면서 반란군은 진압군에게 몰리면 지리산으로 들어갈 것이라며 처음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진압 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순천시가지 수복작전은 21일 오후 10시부터 시작되었다. 장갑 수색중대를 선봉에 내세우고 L-4 정찰기들을 상공에 띄우고 제3연대, 제12연대등이 공격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반란군의 저항은 미미하였다. 여수와 마찬가지로 순천에 도착한 반란군들은 순천을 장악한 즉시 빠져나갔다. 순천에 남은 반란군의 숫자는 미상이지만, 벌교출신 한모 상사의 지휘하에 150명이 벌교로 후퇴하여 벌교를 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으로 봐서 여수에 남은 2개 중대와 비슷한 규모로 추측된다. 순천의 완전 수복은 10월 23일 오전중에 이루어졌다. 반군토벌 사령부는 11월 13~14일 순천현지에서 군법회의를 열어 검거된 폭도 피의자 458명중 101명을 무죄석방, 79명을 징역 20년, 79명을 징역 5년, 102명을 사형에 처했다. 또한 전남 학무당국은 이에 관련된 순천지방 초등학교 불순교사 61명을 파면하였다. 23일 오전 9시 40분 함포 사격을 지원받아 5연대가 여수 수복작전을 개시하였지만 반란군의 저항이 거세 실패한다. 24일 두번째 공격은 송호성 장군이 직접 지휘를 맡아 여수 인구부(연등동 일대)에서 펼쳐지나 이번엔 매복에 걸려 송 장군이 부상을 당하고 그렇게 후퇴하게 된다. 25일부터 박격포로 화력 지원을 받는 12연대가 주공을 맡게 되고 결국 27일 여수를 탈환한다. 하지만 이때 이미 대다수는 지리산이나 벌교 등으로 도주한 이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